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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553
한자 三一運動
영어공식명칭 The March 1st Movement
이칭/별칭 3·1 만세 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심옥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919년 3월 20일연표보기 - 3·1운동 독립 선언서 유포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20일 정오 - 거창 3·1운동 가조 장날 만세 시위 발발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20일 정오 - 거창 3·1운동 가조 장날 만세 시위 전개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22일 오후 2시 30분경 - 거창 3·1운동 거창 장날 만세 시위 전개
전개 시기/일시 1919년 4월 8일 정오 - 거창 3·1운동 위천 장날 만세 시위 전개
종결 시기/일시 1919년 4월 말 - 3·1운동 위천 장날 만세 시위 후 체포, 군중 해산. 주동자는 거창 헌병대로 압송, 옥고
발생|시작 장소 만학정 -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장기리 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가조면 -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종결 장소 위천면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성격 독립운동

[정의]

경상남도 거창 일대에서 1919년 3월 20일부터 4월 말까지 일어난 민족 독립운동.

[개설]

거창 3·1운동은 1919년 3월 20일부터 4월 말까지 일본의 강제적인 식민지 정책에 대항하여 가조면 장터, 거창읍 장터, 위천 장터 등 거창 일대에서 전개된 민족 독립운동이다.

[역사적 배경]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3·1운동은 일본 제국의 수탈과 탄압 속에서 독립에 대한 열망을 거국적으로 표출한 민족 운동이었다. 첫째, 지역, 성별, 연령을 초월한 거국적인 민족 항일 운동이었으며, 둘째, 기존의 유교 사관을 넘어선 민중 주도의 저항 운동이었으며, 셋째,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전개됨과 동시에 독립이라는 최종 목표에 합치되고 있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는다. 3·1운동의 과정에서 거창에서 전개된 3·1운동은 민족 대표 33인이 주도한 독립 선언서의 보급과 서울 탑골 공원에서 시작된 만세 운동이 거창 지역까지 전파되면서 시작되었다. 그 흐름에서 거창3·1운동은 거창의 지역성과 지역민의 자발적 활동, 그리고 주체적인 민족의식을 토대로 지역민이 대거 참여한 민족 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1919년 3월 1일 탑골 공원을 시작으로 만세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3월 3일 부산과 마산에 독립 선언서가 배포되면서 만세 운동은 경남 일대로 확산되었는데, 거창 3·1운동은 3월 20일에 만세 시위로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앞장 선 이들은 거창 유림을 대표하는 유생들이었다. 이어 농민을 포함한 지역민이 참여, 확산되면서 치열한 항일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거창 3·1운동은 3월 20일 가조 장날 만세 시위와 3월 22일 거창 장날 만세 시위가 대표적이며, 이를 ‘가조 3·1운동’이라고도 한다. 이어 4월 8일 위천 장날에 일어난 만세 시위가 ‘위천 3·1운동’이며, 모두 거창 3·1운동의 범주에 있다.

[경과]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주목된 또 하나의 운동이 바로 파리 장서(長書) 운동이다. 1919년 4월 한국 유림 대표 137명이 연서로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장서를 보냈는데, 이는 3·1운동과 함께 한국 독립의 염원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전통적인 유교 사회를 주도했던 유림의 근대적이고 파격적인 독립운동의 행보로 주목받았다. 유림 세력은 1918년 말부터 친일 세력의 매국 행위를 규탄하고, 국제적으로 한국 독립을 청원해야 한다는 움직임을 같이했다.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파리 장서 계획에 뜻을 같이했는데, 파리 장서 운동의 대표자는 거창 출신의 곽종석이다. 또한 김창숙, 김정호, 이중업, 성태영, 윤중수, 유진태 등이 지역 대표로 독립 청원서를 준비하였고, 거창은 곽종석 외에도 김재명, 변양석, 이승래, 윤인하, 박종권, 윤철수 등 여섯 명이 장서에 서명하고 참여하였다.

[결과]

가조 3·1운동은 가조 장날인 3월 20일 정오 장터에 400~500여 명이 모여 만세를 선창한 뒤, 일본 경찰에 의해 60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거창읍 일본 헌병 분대로 압송되었다. 이어 전개된 거창 장날 만세 운동은 거사일을 3월 22일로 잡고 준비하였으나 정보가 누설되어 3월 22일 아침에 책임 대표 다섯 명과 주도자가 체포되었다[오문현, 어명철, 김호, 신병희, 이병홍, 최영순, 김채환 외]. 당일 오후 2시경 가조면 장기리 만학정 앞에서 주민 3,0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하면서 시위 행렬은 거창읍을 향했다. 그 과정에서 지역민 다수가 일본 경찰에 의해 순국하거나, 부상, 체포되었다.

-순국자: 신문구, 배영환, 이석종, 조이록

-수형자: 김병직, 어명준, 김호, 어명철, 김관묵, 김익동, 이병홍, 강두몽

-부상자: 최학서, 최상선, 이점준, 문철주

-참여자: 오문현, 어명우, 김채환, 최영순

위천면에서의 3·1운동위천면의 정대필과 유희탁의 주도로 4월 8일로 계획되었고, 위천면, 복상면, 마리면 등에 계획을 알렸다. 당일 정오에 주민들은 만세 행렬을 이루며 일본 경찰과 대치했고, 헌병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격렬하게 싸웠다. 그 과정에서 정대필과 유희탁은 체포되었고, 군중은 해산되었다.

3·1운동의 과정에서 장서 운동이 발각되어 많은 유림들이 검거되는 등 고초를 겪었고, 상하이 임시 정부에서 발송한 장서가 각 향교에 배달되면서 유림 검거 열풍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파리 장서는 독립운동의 배경, 독립의 성취 방법, 한국 망국의 배경, 유림의 대일관 및 대외관, 민족 독립의 당위성 등을 담아 국제 사회에 한국 독립을 청원함으로써 세계 각국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파리 장서 운동3·1운동에 이어 국내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중요한 신호탄이 되었다.

[의의와 평가]

거창 3·1운동은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전개되었지만 전개 양상, 참여 계층, 독립운동의 영향 등에서 몇 가지 의의를 가진다. 첫째, 거창 3·1운동의 초기에는 유림이 주도했지만 점차 농민과 지역민이 참여하는 민중 운동으로 확산 및 강화되었다. 둘째, 거창 지역의 유림은 3·1 운동뿐만 아니라 파리 장서 운동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국내외 독립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셋째, 거창 3·1운동은 자발적인 항일 운동이며, 영남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3·1운동의 흐름과 같이했던 전 민족 운동적 성격을 띠고 있다. 넷째, 거창의 지역성, 시대성, 민중성을 3·1운동의 과정에서 엿볼 수 있으며, 이후 독립운동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거창 3·1운동은 한계도 있다. 지역의 3·1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 사상자, 수형자, 참여자 명단에 수록되지 않아 서훈을 받지 못한 인물이 다수가 있다. 향후 이들의 활동을 규명하기 위한 부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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