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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8년 정희량의 정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539
한자 -年鄭希亮-政變
영어공식명칭 Political Upheaval of Jeonghuiryang
이칭/별칭 무신란,정희량의 난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채광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728년 3월 20일연표보기 - 1728년 정희량의 정변, 정희량이 안음에서 기병
발생|시작 장소 1728년 정희량의 정변 발생지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종결 장소 1728년 정희량의 정변 종결지 - 경상남도 거창군
성격 반란
관련 인물/단체 정희량|이웅보

[정의]

1728년(영조 4) 3월 20일 정희량이 거창 일대에서 일으킨 난.

[개설]

1728년(영조 4)에 노론 정권에 불만을 품은 소론 과격파와 남인들이 연합하여 영조와 노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전국적인 규모로 기병(起兵)을 한 사건이다. 무신년에 일어나 무신란(戊申亂)이라 하거나, 이인좌(李麟佐)의 난이라고도 한다. 정희량(鄭希亮)의 난은 1728년 3월 20일 안음현에서 난을 일으킨 정희량과 이웅보(李熊補)가 안음, 거창, 합천, 함양을 점령한 사건을 말한다. 4개의 현을 점령한 그들은 당초의 계획대로 이인좌의 군대와 합세하려고 했지만 관군의 방해로 실패하고 결국 관군에 의해 붙잡혀 처형당한 후 난은 평정이 된다.

[역사적 배경]

1623년 인조반정으로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인이자 북인의 영수인 정인홍(鄭仁弘)이 제거되고 북인 세력이 몰락하게 된다.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조식의 문인들이 대부분이던 경상우도의 사족들은 중앙 관직으로 진출하는 길이 막히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694년에 갑술환국으로 인해 남인들이 완전히 실각하게 되자 남인들도 중앙 관료로 나가는 길이 막히게 된다. 따라서 노론 중심의 정권에서는 영남 사족들이 아무리 공부를 하여도 과거 시험에 급제하기가 어렵고, 급제를 하더라도 거의 등용되지 않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경종의 즉위로 소론이 집권했는데,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영조가 즉위하게 되면서 노론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여기에 위기감을 느낀 일부 소론 과격파와 소외받고 있던 남인들이 난을 일으킨 것이 곧 무신란이다.

[경과]

군사를 일으킬 날을 1728년 3월 12일로 정하여 청주(淸州)에서 합류하기로 했으나 정희량의 군사가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이웅보와 조세추(曺世樞)는 3월 11일 청주를 떠나 12일에 안동에 들어가 김구(金榘)에게 행동을 촉구했다. 그러나 김구가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권덕수(權德秀), 김민행(金敏行), 유몽서(柳夢瑞) 등도 역시 같은 태도를 취하자, 이웅보 등은 안동을 떠나 안음의 정희량에게 가서 함께 기병하였다.

3월 20일 곧장 안음현(安陰縣) 관아로 들어가 현감 오수욱(吳遂郁)을 보고는 글을 던지고 갔다. 오수욱은 글을 보고 두려워하여 병영(兵營)으로 도망을 갔다. 또 거창 현감 신정모(申正模)에게 투서(投書)를 하니 역시 신정모도 두려워하며 담을 넘어 도주하였다. 이때 두 고을의 군민들이 모두 따르니, 창고의 곡식을 더 내어 군민(軍民)들에게 나누어 주고, 각 절의 승려로 하여금 운반하게 하였으며, 각 역(各驛)으로 하여금 마필(馬匹)을 세우게 하였다.

합천 사람 조성좌(曹聖佐) 역시 정희량에게 응하고자 먼저 군수 이정필(李廷弼)에게 안음의 형세를 크게 과장해 공갈하고 위협했다. 이정필이 처음에는 깨닫지 못하다가 후에야 조성좌가 적임을 알고 가두었으며, 또 본군의 군사를 풀어 객사 밖에 진을 쳤다. 이후 좌수 정상림(鄭商霖)이 조성좌와 함께 적을 따르고자 하여 이정필을 협박하니 이정필이 그 말을 믿고 22일 새벽에 도망갔다. 정상림이 즉시 옥문을 열고 조성좌 등을 석방하고, 군중(軍中)으로 들어가 장졸들을 거느리고 절을 하였다. 삼가(三嘉) 좌수 권만항(權萬恒) 역시 현감 이정수(李廷秀)를 내쫓고 그 군사를 가지고 합천으로 합세하였다.

정희량은 당초의 계획대로 이인좌의 군사들과 합세하기 위하여 함양으로 들어가 장차 전라도 경계를 넘으려 하였으나, 운봉 영장(雲峰營將) 손명대(孫命大)가 이 일을 듣고 미처 관찰사와 병마절도사에게 보고하지 못하고 급히 속읍의 군사를 동원하여 먼저 팔량령(八良嶺)을 점거하였기 때문에 하루를 머물다가 거창으로 돌아왔다. 이웅보와 정희량 등은 거창으로 돌아와 군사를 둘로 나누어, 이웅보는 우지령(牛旨嶺) 밑에 둔을 치고 장차 지례(知禮)로 향하려 하고, 정희량은 생초역(省草驛)에 둔을 치고 장차 무주(茂朱)로 향하려 하였다. 그런데 선산 부사(善山府使) 박필건(朴弼健)이 금오진(金烏鎭)의 군사를 거느리고 우지령의 험한 곳을 먼저 점거하고, 무주의 고갯길에도 또한 전라도의 군사가 점거하여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결과]

정희량은 더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거창 경계의 우지치(牛旨峙)에 둔을 치고 웅거하였는데, 선산 부사 박필건이 우지치의 험지를 먼저 점거하였다. 이보혁(李普赫)정양빈(鄭暘賓)은 이미 합천을 수복하고 거창으로 진군했으며, 이석복(李碩復)과 우하형(禹夏亨)도 진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에 박필건은 아전 김진평(金鎭平)을 시켜 적진에 들어가 장졸과 더불어 기(旗)를 휘둘러 신호를 삼을 것을 약속하고, 박필건이 선봉이 되어 고개를 넘어 적진을 바라보고 기를 휘두르면서 크게 고함치니, 정희량의 군세는 일시에 모두 무너졌다. 그 결과 정희량과 이웅보 등 21인을 붙잡아 목을 베어 난은 진압된다.

[의의와 평가]

정희량의 난은 중앙 권력층에서 세력을 잃은 지방 사족들의 반란이었던 만큼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또한 같은 지역인 경상우도 및 좌도의 사족들에게조차 지지를 받지 못한 점도 한계로 볼 수가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7.11.28 인명 수정 신만항(愼萬恒) -> 권만항(權萬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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