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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 전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534
한자 牛峴 戰鬪
영어공식명칭 Uhyeon Battle
이칭/별칭 우척현 전투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 6월 14일연표보기 - 우현 전투 발생
종결 시기/일시 1592년 6월 18일연표보기 - 우현 전투 종결
발생|시작 장소 우현 -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우두령지도보기
종결 장소 우현 -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우두령
성격 의병 전투
관련 인물/단체 이형|김면|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정의]

임진왜란 중에 1592년 6월 경상도 거창현 우현에서 이형(李亨)의 의병 부대가 일본군을 물리친 전투.

[개설]

거창현(居昌縣) 우현(牛峴)[우척현(牛脊峴)]은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과 경상북도 김천시 경계에 있는 고개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중에는 일본군이 전라도로 진격하는 중요한 길[요로(要路)] 중 하나였다. 임진왜란 초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일본군 제6진이 우현을 통해 전라도로 진격하였는데, 1592년 6월 중순경 이형(李亨)이 이끄는 의병군이 이들을 우현에서 싸워 물리쳤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 발발 후 일본군은 해상을 통해 전라도로 진격하려 했으나 이순신(李舜臣)의 수군에 의해 저지당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육로를 통한 전라도 진격을 시도하였으나, 조선군 관군 및 의병에 의해 저지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일본군 제6진 고바야카와는 우회 작전을 시도하였다. 1592년 6월 중순 고바야카와는 경상도 개령(開寧)·김산(金山)·지례(知禮)에 주둔하고 있던 1,500명의 정예 병력을 이끌고 우현을 넘어 거창현·안음현(安陰縣)을 거쳐 전라도 장수현(長水縣)으로 진격하려 했다.

당시 우현은 의병장 이형이 지키고 있었다. 이형은 경상도 함안군(咸安郡) 출신으로 1572년(선조 5) 무과에 급제한 인물이다. 원래 경상도 관찰사(慶尙道 觀察使) 김수(金睟)의 군관이었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에는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복병장(伏兵將)이 되어 우현을 지키던 중이었다.

[경과]

1592년 음력 6월 중순경[6월 14~18일 사이] 우현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일본군과 매복해 있던 이형의 조선 의병이 충돌하였다. 이때 이형은 산척(山尺) 수백 명을 이끌고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산척은 수렵으로 생활을 영위하던 일종의 사냥꾼으로 산악에서 전개되는 유격전에 유용한 사람들이었다. 결국 매복 작전에 휘말린 일본군은 대열이 무너져 퇴각하고 만다. 당시 이형은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독려하였으나, 끝내 전사하였다.

[결과]

우현 전투의 패배로 일본군은 퇴각하였고, 전라도 진출은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전투가 끝난 후 초유사 김성일은 고령현(高靈縣)에 주둔하고 있던 의병장 김면(金沔)에게 전투 사실을 급히 알렸다. 이에 김면은 거창 지역이 진주(晉州)를 비롯해 10여 고을을 지키는 두뇌와 같은 요충지라 판단하였다. 마침내 부하 장수를 시켜 고령을 지키게 하고, 6월 19일 본인이 직접 거창으로 오게 된다. 이후 김면은 거창 지역의 방어 전략을 모색하게 된다.

6월 21일 우현에 의병을 보내어 돈독히 지키게 하였으며, 같은 날 김수가 거창으로 왔다. 6월 22일 정인홍(鄭仁弘)도 거창으로 와 일본군을 물리칠 방도를 논의하였고, 6월 24일에는 김면이 여섯 고을의 의병을 모아 거창 영계(瀯溪)에서 결진(結陣)하는 등 방어선을 더욱 돈독히 하였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좌절시킨 전투 중 하나다. 또한 전란 중에 산척이 활약한 전투이기에 주목을 받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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